✅ 창덕궁
창덕궁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건축사에 있어 조선 시대 궁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후원의 조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 창덕궁 |
창덕궁, 덕수궁, 경북궁의 정전앞에는 정1품에서 정9품까지 자리가 있습니다.
태종때 정1품이 저의 선조께서 자리했던 곳이네요.
✅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창덕궁
1392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어요. 그러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을 지었지요. 태조가 경복궁에 머물며 나랏일을 돌보는 동안 후계자 정하는 일을 두고 왕자들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어요.
태조는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요. 이에 불만을 품은 다섯째 아들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자신과 반대편에 선 형제인 방석과 방번, 조선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정도전 같은 신하들을 무참히 살해했어요. 이 일이 바로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방원은 형 방과를 2대 왕 정종으로 임금 자리에 앉혔어요. 왕위에 오른 정종은 다음 해에 수도를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옮겼어요.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의 현장인 한양이 싫었기 때문이지요. 왕위에 욕심이 없었던 정종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요.
이방원은 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은 아버지가 수도로 삼았던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도록 했고, 그렇게 지어진 것이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은 왕위를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에서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 조선시대 궁궐
선조들의 자연관을 잘 보여 주는 궁궐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자연과 조화를 이룬 창덕궁 후원
새로운 궁궐 터로 정해진 곳은 경복궁 동쪽 향교동(지금의 종로구 와룡동)이었어요. 1404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1년 뒤인 1405년 10월에 새 궁궐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어느 나라든 궁궐은 왕조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짓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의 궁궐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도 유교 예법에 따라 일직선 상에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배치되어 있지요. 그에 반해 창덕궁은 주어진 환경에 맞게 지어져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답니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이용한 공간 배치입니다. 창덕궁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과 정원은 물론이고 작은 돌과 나무 한 그루까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창덕궁에 가 보면 북한산과 매봉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창덕궁과 연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것을 보면 창덕궁이 일부러 터를 만들어 건설한 궁궐이 아니라 자연 지형의 연장선상에서 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 서면 경복궁이나 창경궁, 경희궁과 달리 정문에서 정전을 볼 수 없습니다.
건물들이 일직선 상으로 배치되지 않고, 자연 지형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저마다의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지요.
북쪽에 있는 창덕궁의 후원(정원) 역시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중시했는지 잘 보여 주는 곳이에요. 나지막한 언덕, 계곡과 어우러진 숲과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만든 연못과 건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의 인공 시설물과 건물들은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아요. 자연과 건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모두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답니다.
✅ 창덕궁의 상징, 인정전과 인정문
창덕궁은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궁궐에서 왕과 신하들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을 외전, 왕과 왕족들이 살았던 개인적인 공간을 내전이라고 해요. 외전은 돈화문에서 시작되지요.
돈화문은 지금 남아 있는 궁궐 출입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문이에요.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라는 돌다리를 건너면 진선문이 나와요. 진선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이 보이지요.
인정문에서는 특이하게도 왕의 즉위식이 열렸답니다. 물론 대부분의 왕들은 정전인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효종, 현종, 영조 등은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답니다.
인정문의 앞마당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인정문 앞마당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도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하여 건축했기 때문이랍니다.
인정문 안쪽에는 2층 월대 위에 인정전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어요. 인정전은 창덕궁을 상징하는 건물인 정전입니다. 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나라의 공식 행사가 열렸던 장소이지요.
인정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내는 하나로 트여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소박한 옥좌, 일월오봉병(병풍), 아름다운 문양의 천장은 조선 왕조의 위용과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인정전은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의 역사를 말해주는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뒤 임진왜란과 화재로 세 번이나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인정전은 1804년에 지어진 네 번째 건축물이지요.
✅ 나랏일을 논의하던 선정전과 희정당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과 수시로 만나 나랏일을 논의했습니다. 나랏일을 논의하던 장소를 편전이라고 해요. 선정전이 바로 편전으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선정전은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지붕이 청색 기와로 되어 있어요.
당시에 청색 기와는 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왕이 나랏일을 보던 선정전만 청색 기와를 덮은 것이지요. 훗날 희정당으로 편전을 옮긴 이후에 선정전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대조전
희정당 뒤편에는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공간인 대조전이 있습니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해요. 매우 중요한 장소였지요.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이름은 국가의 기틀을 이어 가는 세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국가와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대조전에는 처음에 왕비가 머물다가 훗날 왕과 왕비가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어요. 부부라면 당연히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조선의 왕과 왕비는 잠자는 곳이 달랐답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어떤 건물보다도 수난이 많았던 건물입니다. 수차례나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어전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했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대조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 검소한 공간 낙선재와 그 밖의 공간들
궁궐 동쪽 끝에는 낙선재라는 소박한 건물이 있습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하여 마련한 공간입니다. 헌종은 낙선재를 지은 뒤 옆에 석복헌과 수강재를 추가로 지었고, 이 세 건물이 있는 곳을 통칭하여 낙선재 일곽이라 부르고 있어요.
실용주의자로 검소했던 헌종은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 사용할 건물에 단청을 생략하였고, 대신 창살과 벽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했지요.
낙선재에는 비운의 마지막 황태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영친왕이 머물기도 했어요. 고종의 7번째 아들이었던 영친왕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 왕족인 이방자(일본 이름은 마사코예요) 여사와 결혼했지요. 독립 후 1963년 귀국하여 이곳에서 살다 생을 마감하였답니다.
✅ 자연과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 후원
창덕궁 북쪽 구역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던 곳으로 한때는 ‘금원(출입할 수 없는 정원)’이라 불리기도 했어요. 후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어요.
왕과 왕족이 독서를 즐기고 휴식을 취했던 공간이자, 왕의 사냥터와 무술을 연마하는 곳으로도 쓰였지요. 때로는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고, 연회장과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창덕궁은 자연 지형과 경관을 잘 활용한 궁궐로 유명합니다. 후원은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소입니다. 나지막한 언덕과 계곡, 울창한 숲 주변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어느 곳이 자연 공간이고 인공 공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지요.
각기 규모가 다른 4곳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부용지, 애련지, 존덕정, 옥류천을 보면 조선 왕조의 정원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답니다.
✅ 조선 시대 정원을 대표하는 부용지
낙선재와 성정각 사이로 이어진 완만한 언덕길을 넘으면 창덕궁 후원을 대표하는 부용지 구역이 나와요. 언덕 아래의 연못과 단아한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습니다.
원래 부용지 구역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사방이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고 해요. 지금도 담장이 약간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사방으로 담장을 쌓아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부용지의 연못은 면적이 약 1000m2로 후원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에요. 연못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둥근 섬이 있어요. 부용지는 동양의 음양 사상을 잘 담아 지은 곳이에요. 음양 사상에 의하면 우주는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네모난 연못은 땅을 의미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답니다.
부용지에는 2개의 기둥이 연못에 들어가 세워진 특이한 모습의 정자, 부용정이 있어요. 부용정은 왕과 왕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즐기던 장소였어요. 지금은 부용정 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옆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조선 시대 왕세자가 된 것같이 느껴진답니다.
✅ 선비의 단아함을 닮은 애련지와 존덕정
창덕궁의 유일한 석조문인 불로문
부용지 북쪽에는 숙종 때 지어진 애련지가 있습니다. 숙종은 〈애련정기〉라는 글을 통해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이곳의 이름을 ‘애련지’라고 붙였다고 해요.
애련지로 들어가려면 늙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로문을 통과해야 해요. 조금은 단출한 느낌을 주는 정자 애련정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조선 시대 선비의 단아함을 닮은 것 같답니다.
애련지 남쪽으로는 효명 세자가 서재로 사용했던 의두합과 창덕궁에서 가장 작은 건물 운경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연경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조 때 지어진 연경당은 조선 시대 양반집을 본떠 지은 건물이에요. 훗날 순조와 왕비는 연경당에 머물며 손님을 맞았다고 해요.
사랑채와 안채, 서재인 선향재, 농수정 등으로 이루어진 연경당은 99칸까지만 지을 수 있었던 일반 양반집과는 달리 120여 칸으로 구성되어 있어요.